Kuhn vs Popper






얼마 전 Amazon.com에서 득템한

「Technology Forecasting in Perspective」를 처음부터 다시 보던 중

지나쳤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단어와 또다시 마주했다.


'Fuller Integration'


fuller?

full의 비교급으로 쓴건가?

아무리 수소문 해봐도 역시나 명쾌한 해석은 없었고,

대신

옆골목으로 빠져,,

Fuller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인터넷은 항상 이게 문제다.










그는 과학철학 쪽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인 듯 보였다.

많은 저서들이 있었는데,

그 중 내 시선을 단방에 사로잡은 제목은

바로


「Kuhn vs Popper」(2005)
(쿤/포퍼 논쟁)




당장 새로운 탭에서 책을 구매했고,

읽는동안 꽤 괜찮은 생각을 해봤던 것 같다.

(fuller integration의 뜻은 여전히 숙제로 남긴 채...)








책의 큰 줄기는

Kuhn의 '패러다임(Paradigm)' 논리와

Popper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논리가

양대산맥을 이루는 과학철학사에서

저자인 Fuller가 Popper의 주장을 뒷받침 하며

Kuhn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특히 와닿아

새길만한 내용을 남겨본다.







그렇다면 내 생각에 쿤은 과학자 사회를 종교 집단과 유사하게 보고 있으며,

과학을 과학자의 종교로 보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가 정상과학을 혁명적 과학보다 우위에 올려놓았는지 알 수 있다.

혁명적 과학은 종교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위기와 분열, 혼란과 절망, 정신적인 파국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정상과학에 반대하여」, 존 왓킨스-









우리는 경험에 채여 비틀거리지도 않고, 그것들이 강물처럼 우리 곁을 흘러가게 두지도 않는다.

우리는 능동적이어야 하며, 경험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자연에 던질 질문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며, 

'예' 혹은 '아니요'의 명쾌한 답을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도 바로 우리다.

그리고 종국에 답하는 것 또한 우리이다.

엄밀한 조사 후에 대답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과학적 발견의 논리」, 칼 포퍼-









우리는 증거에 의해 믿는가?

결단에 의해 믿는가?

- 본문 중, 스티브 풀러 -









나는 과학이 성공적으로 제도화되는 데에

대학 자체의 판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나는 대학이라는 텃밭에서 그 꽃을 피우기 위해 과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때로는 마지못해, 외부의 거대한 전문가 집단의 이익을 위해

대학이 그 판단 기준들을 포기하도록 설득함으로써 불행하게 존재해왔다고 생각합니다.

- 1972년 6월 21일 제롬 라베츠에게 보낸 편지, 토머스 쿤 -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철학자들의 공통된 출발점은 다음과 같은 원리로 요약된다.

"어떤 지식이든 그것이 습득되는 조건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비판만이 유일하게 보편적으로 믿을 수 있는 방법이다."

- 본문 중, 스티브 풀러 -









석사에게 연구는 교육의 부산물이며, 특히 학생들이 강의 내용에 대해 갖는 반발에 대한 소크라테스식 반성이다.

연구의 목적은 '정신(독립된 사고)'을 '물질(소박한 편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된다.

깊이 있는 독서, 비판적 사고, 효과적인 담화를 통해 자아를 훈련시키려는 인문주의적 관심사는 이러한 범주로 나뉜다.

반면, 대조적으로,

박사에게 교육은 사회적 통제와 개인의 전문적 지식의 표출에 사용되는 도구로 최신연구를 강화하고 분배하기 위한 수단이다.

최고의 정신성에게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대신, 교육은 정신이 중심과 방향, 곧 제도적 구조 안에 자신의 자리를 찾게 만든다.

- 본문 중, 스티브 풀러 -









포퍼와 라카토스, 그리고 저자인 풀러에 따르면, 역사에는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이 숨어 있다.

즉, 현재는 최선의 결과가 아니다.

현재는 과거 행위자들의 특정한 선택 결과이며,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현재는 보다 나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대해 평가할 수 있고, 과거의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때의 평가란 놓쳐버린 반 사실적 가능성들을 분별해내는 우리의 능력과 관련된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능력 때문일 것이다.

풀러가 보기에, 쿤과 그를 이어받은 지식인들의 태도는 자기 반성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 해설 중, 정동욱 -











Kuhn은 정상과학을 패러다임이라는 굴레로 정의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반면,

Popper는 패러다임에 안주하는 것은 지각하는 자의 태만이며, 언제나 비판적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

서로는 서로의 약점을 그 누구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다.




'Kuhn의 정상과학 논리'는 New Science에는 매우 적합한, 때로는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쇠퇴기에 있는, 혁신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는 그 취약점이 드러난다.


반면,


'Popper의 반증가능성 논리'는 혁신에 Open되어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Post 혁신기에서 소모적 반증만을 유도하기도 한다.



쉽게말하자면

Kuhn은 '이왕 마음 먹었으면 한 동안은 매달려 보자!'란 입장이고,

Popper는 '먹은 마음을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매달릴 시간을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자!'란 입장이다.




Kuhn은 '사회적 성취'에, Popper는 '개인적 성취'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것 같다.




Kuhn은 나의 시대, 즉 내가 태어난 시대에 주어진 규범(성공양식)이 있다면

그 틀 안에서의 성취로서 인간이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보는 쪽에 가깝다.

(물론, 세기마다 한 두 명씩 extra-범인이 나타나 규범을 뒤집기도 하지만..)


반면,


Popper는 주어진 공통의 사회규범을 나의 의식, 나의 가치관, 나의 기준과 끊임없이 비교해가며

거부할 것은 자유롭게 거부하면서 개인적 규범을 만들어 가는 것을

인간의 성취로 보는 쪽에 가깝다.

(물론, 그 개인적 규범이 설득력을 갖아 공통의 규범이 된다면 그는 extra-범인이 되고야 만다.)



이 즈음에서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개인적 가치관과 시대적 규범이 일치하는 사람은 참 행복할 것 같다.'

(정치적으로는 이런 사람들을 '여당'이라 부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세상은 '반증'이 필요한 시기로 보인다.

현대의 인간의 성취를 정의하는 규범은 적어도 내 가치관으로는 너무나 잔인하고, 일방적이다.

눈감기 전의 회한이 벌써부터 걱정될 뿐이다.


더 무서운 것은

'반증'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정상과학자'들의 태도이다.




때로는 '당연해 보이는 것'에 '왜'라고 물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연해 보이는 것'을 진심으로든 타협으로든 따라온 사람들은 어느덧 그 규범에 대한 기득권을 가져버렸다.

이 사람들은 Paradigm shift를 일으킬 자격이 있고, 능력도 충분하다.

언제나 숨쉬지도 못하는 그놈의 기득권이 문제지..


반대로,


때로는 extra-범인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궁이에 장작을 팍팍 넣어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스나 전기타령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




반증론자들은 정상과학자들이 공들여 쌓아온 탑의 밑둥을 빼버리겠다는 충동으로 반증을 제기해서는 안된다.

정상과학자들도 자신들이 쌓아온 탑에 대한 집착을 근거로 해서 반증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헛수고란 없다.

지금와서 헛수고라고 부르는 일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그 안에서는 보람과 행복을 누렸던 개개인의 인생이었으며 우리들의 역사다.




이 즈음에서

다시 생각의 뿌리로 돌아오면

Popper는 과학을 대하는 바람직한 'Attitude'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고,

Kuhn은 그러한 과학의 길이 나타내는 궤적의 'Pattern'에 대해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누군가 'vs'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묻는다면

'Kuhn의 개념이 좀 더 포괄적이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PS.

요즘 모든 것을 양시론으로 바라보는 소극적인(?) 버릇이 생겨버렸다.

각각의 주장이 근거하는 배경을 알아볼 수 있는 여유가

'현재 상황에서 그 주장이 유효한가?'에 대한

판단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