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사실 철학적 행복이며, 유리하거나 불리한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행복이다. 또한 유쾌함과 불쾌함 사이의 일시적 변화에도 의존하지 않는 행복이다. 그보다는 삶의 모든 양극성 속에서 늘 새로이 발견하는 균형이며, 각각의 순간이 아니라 전체 삶을 관통하는 균형이다. 그것은 성취와 미성취, 성공과 실패, 쾌락과 고통, 건강과 질병,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불만, 충만한 날뿐만 아니라 텅 빈 날들까지도 모두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심지어 넘치게 충만한 단 하루를 얻기 위해, 텅 비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수많은 날들을 버텨내는 것조차 전적으로 당연한, 그런 행복이다.
유한한 인간은 삶의 충만함에 동참할 수는 있지만, 완벽한 총체적 충만이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 안에서 완전한 충만을 찾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것은 무한성의 차원 속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인간에게 행복이 남기는 것은 언제나 편린이며 행복의 조각들뿐이다. 행운은 물론, 기쁨만을 추구하는 행복에서도 그 조각들은 찰나이며, 지복 또한 조각으로 남는 것이다.
대칭, 균형, 조화라는 것은 보통 동시에 도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통시적으로 시간을 관통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저울의 바늘이 한쪽 또는 다른 쪽으로 기울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전체 시간 속에서 삶의 양극성이라는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 달려나가는 인생은 누군가가 던져준 삶의 조건에 매달려, 그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며 살아가는 아주 피상적인 삶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이유로 바로 이 비극적 통찰이 비극을 어리석게 부인하는 것보다 한층 더 삶에 부합하는 것이며, 삶을 알차게 만드는 것이다.
비애와 우울증은 서로 분명하게 구별된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경직된 감정과 경직된 생각, 불쾌, 성찰 불가의 특징을 나타내는 데 반해, 감정이 움직이고 성찰이 가능한 비애감은 멈추지 않는 생각과 자성이라는 과도한 정신활동을 특징으로 한다.
모든 결속은 결속 없는 시대에 있어 귀중한 것이다. 결속 상실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 결속의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 그리고 이 결속의 상실은 실존을 위협할 수 있는 의미의 상실을 동반한다. 따라서 긍정적 결속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격렬한 감정적 관계라도 맺게 하여 기댈 곳을 제공하게 된다. 즉 싸움과 다툼이라는 부정적 결속이라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참여하고 싶어하고,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한다. 그만큼 대화에 낄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긍정적으로 의미로 의미를 부여한다.
쓰여진 그대로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다면 그것은 이미 시가 아니다. 시는 각자의 가슴에서만 시로 다시 태어난다. 삶도 그런 것이다. 인간의 목숨은 각자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때에만 삶으로 변한다.
우리는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의미의 경직을 막아내고 분쇄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구축해놓은 기존의 의미와 해석을 교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의미에 늘 의문을 품고 재차 확인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의미 비평'이라고 부른다. 의미는 끝없이 우리에게 당위를 부여하며 그 지위를 지켜내야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재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시키려는 목표는 오랫동안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공동 관심사였다. 단지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어 다툼이 있었고, 그 싸움은 체제 간의 지속되는 전쟁을 유발시켰다. 그러나 결국 하나의 체제만이 남게 되자 그 목표는 의미를 잃었다. 이 체제는 체제만 잘 유지되면 의미에 대한 물음까지도 해결된다는 치명적인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이런 과도기에 일반적으로 체제, 사회, 국가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은 개인 삶에서의 행복을 요구하고 있다.
다른 현대는 다시 목적론적 의미 부여를 시도할 것이고 하나의 이상향을 설계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생존의 이유에서 생태적 사회, 공익사회, 더 이상 국가적으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그런 이상향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세든 내세든 간에 그저 유토피아적인 이상향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 존재가 보편적 안락함을 느낄 것이고, 그 누구도 더 이상 "도대체 행복이란?"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작업이 성공한다면 아무도 성공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의미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한 논쟁의 물결은 다시 물러나 역사에서도 사라질 것이다. 행복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행복한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행복의 역사에서 다른 장이며, 가장 힘든 장이다. 이 사람들은 한 시대를 살 것이며 또 다른 도전들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