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껏 진심으로 알고자 해서 덤벼들었던 것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진 바가 있다.
무언가를 배울 때
'흥미', '호기심'이라는 밑천이 떨어져 갈 즈음에서야
원했던 '앎의 완성'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 바로 앞에는 뛰어넘어야 할 '마지막 장벽'이 항상 나타난다는 것.
게임으로 치자면 끝판왕의 존재라고나 할까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 장벽이 결국 '앎의 에센스'이지만
앞서 주변지식을 얻어왔던 과정과는 달리
정형화된 학습양식이 없다는 점.
어쩌면
그 학습양식을 창의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모든 앎에 있어 정형화된 노하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문제는
창의적으로 마지막 장벽을 넘어 결국 앎의 고지에 오른 사람들은 별 말이 없는 반면,
장벽 앞에서 머리속으로만 고지를 다녀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발상에 대해 참 말들이 많다.
결국
이런 시끄러운 양반들 덕에 많은 사람들이 그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모두 함께 같은 장벽을 만나지만,
속시원한 답이 있을리 없다는 점.
종종
다수의 힘으로 그 주제의 속성자체를 애매하고 왜곡되게 정의해버린다는 점.
반대편의 문제는
마지막 장벽을 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앎의 희소성을 깨닫고 보수적으로 변해간다는 점.
이 시스템의 포괄적인 문제는
앎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통해 거래되어야만 삶이 유지되는
세상물정 모르는 지식인들의
유일한 재산이라는 점.
무언가를 배울 때
'흥미', '호기심'이라는 밑천이 떨어져 갈 즈음에서야
원했던 '앎의 완성'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 바로 앞에는 뛰어넘어야 할 '마지막 장벽'이 항상 나타난다는 것.
게임으로 치자면 끝판왕의 존재라고나 할까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 장벽이 결국 '앎의 에센스'이지만
앞서 주변지식을 얻어왔던 과정과는 달리
정형화된 학습양식이 없다는 점.
어쩌면
그 학습양식을 창의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모든 앎에 있어 정형화된 노하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문제는
창의적으로 마지막 장벽을 넘어 결국 앎의 고지에 오른 사람들은 별 말이 없는 반면,
장벽 앞에서 머리속으로만 고지를 다녀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발상에 대해 참 말들이 많다.
결국
이런 시끄러운 양반들 덕에 많은 사람들이 그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모두 함께 같은 장벽을 만나지만,
속시원한 답이 있을리 없다는 점.
종종
다수의 힘으로 그 주제의 속성자체를 애매하고 왜곡되게 정의해버린다는 점.
반대편의 문제는
마지막 장벽을 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앎의 희소성을 깨닫고 보수적으로 변해간다는 점.
이 시스템의 포괄적인 문제는
앎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통해 거래되어야만 삶이 유지되는
세상물정 모르는 지식인들의
유일한 재산이라는 점.